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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부정공>조봉대부직장공휘온(朝奉大夫尚瑞院副直長公諱穩墓碑陰記)
朝奉大夫尚瑞院副直長公墓碑陰記 昇平之白也山先隴側枕艮而封者我堂兄故朝奉大夫尚瑞院副直長諱穩字安卿之藏竪白碑無顯刻盖未遑也今而孤哀姪淑珪又以其母夫人李令人之葬祔其趾累然來吿曰叔於先君仕宦出處與之略同盖其仁而不壽與夫局於蔭調飛不盡翰最至情所深悼願垂一言貴飾隨道曰嗚呼撫念疇昔欲言先哽更安忍記諸兄不以弘治癸亥二月三十日卒于京第乎汝與宋監察世琳奉旅襯歸葬故山非同年四月乎叔父捐館又不在此際乎以叔父之厚德而不能庇其嗣以兄之至孝而不能終其養俱至於斯噫報施之天若果一切反常世之爲善者將何以勸焉俯仰茫茫不知所言且人與文相得然後可傳來世况如余腐筆乎哉雖然竊以所服於中者則有之盖兄天性愿謹簡潔人不敢干以匪義能於書知自力文藝夙就中 成宗己酉司馬兩試雖爲貴价館甥恥或黌綠進取未嘗以榮塗而汲汲被服操履有同寒素所交遊皆廉靖牢騷之士自壬子筮仕十年間爲參奉者二北部厚陵也爲奉事者二廣興豊儲倉也癸亥遷尚瑞院此盖履歷而任非芻牧職非薇栢愷悌之化謇諤之風不少槩見雖若可慨古人不有郎潜耶揆以時義適會廢朝戕伐善類之際炳幾遠害不賢而能之乎竟以是年吿終距其生成化丙戌僅三十八何其短也吾非不欲詳著平日事行庸慰諸子早孤思慕之心池塘春草夢斷己久吾亦浸衰多不能記記如是而己我淳昌之趙肇自高麗中葉檢校侍中諱璋樹德務滋粤若版圖判書諱洪珪玉川君諱佺聯世膴仕至農隱公諱元吉以進士文科歷官致門下侍中與鄭圃隱李牧隱同德恭讓朝以定策勲拜典工判叙封玉川府院君歸走于淳昌是鼓祖以上曾祖諱瑜號虔谷亦占上第官中顯大夫典農寺副正當麗季喪紀壤廢前後廬墓盡三年制及鼎革不膺我朝漢城判尹之徵筮遯順天富有鄉因家焉 世宗命旌曰孝子前副正趙瑜之閭盖並褒其罔僕義祖諱斯文蔭左軍司正弟節度使崇文丙子禍父子駢命由是不復通籍深自鞱晦司正公有四子第三參禮察訪諱智崙是吾先人之兄而即公所生也妣晋州河氏剛莊公漢女公生而獨子無娣妹聘宗室女永膺大君琰婦翁也柔嘉無挾事舅姑甚謹生與公同庚沒于去年己丑擧五男一女男長淑珪獒樹郵丞娶縣令金允濯女次淑琦娶生員楊均女生二男幼一女適金景貞次淑璟娶忠順衛崔三戒女次淑瑊娶南陽洪起宗女次淑瓘娶靑松沈光鵬女生二男一女皆幼宋世琳婿也魁壬戌別試文科由司憲府監察出爲綾城縣令側室一女適沈煥 조봉대부상서원부직장공묘비음기(朝奉大夫尚瑞院副直長公墓碑陰記) 승평 백야산(白也山) 선영 옆 간좌(艮坐) 언덕의 무덤은 나의 당형(堂兄) 고 조봉대부 상서원 부직장 휘 온(穩), 자(字) 안경(安卿)이 잠든 곳이다. 비문이 없는 비석이 서 있는데 이는 겨를이 없어 그랬던 것이다. 이제 고애질(孤哀姪) 슈규(淑珪)가 또 그의 모부인 영인(令人) 이 씨(李氏)를 그 곳에 부(祔)하고는 여러 차례 와서 말하기를, 『숙부께서는 제 아버님과 벼슬한 출저가 대략 같습니다. 아버님께서 어질고도 長壽를 하지 못한 것과 음보(蔭補)에 국한되어 뜻을 다 펴지 못한 것이 가장 마음이 아픕니다. 그러니 원컨대 한마디 써서 묘를 빛내주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아! 생각을 자아내자니 말하기 앞서 울음이 먼저 나오니 어찌 차마 형의 일을 적겠습니까? 형, 형은 홍치 계해년(一五0三) 二月 三十日, 서울 집에서 돌아가시지 않으셨던가요. 또 내가 감찰(監察) 송세림(宋世琳)과 함께 상여를 받들고 선영에 가 장례를 모신 것이 그해 四월이 아니었던가요. 숙부께서 돌아가신 것도 그 무렵이었지요. 숙부같이 후덕한 분께서 아들을 끝내 보존하지 못하셨고, 형처럼 지극한 효성으로도 끝내 부모 봉양을 마치지 못하고 그 지경이 되었던 것이다. 아! 하늘의 보답이 이처럼 거꾸로 되니, 세상에 착한 일을 하려는 사람을 장차 무엇으로 권면하겠습니까? 하늘을 우러러 보고 땅을 굽어보아도 그저 망망하여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또 사람과 그 글이 서로 걸맞아야만 후세까지 전할 수 있는데 저는 붓이 무딘 데야 어떻게 비문을 쓰겠습니까? 그러나 마음속에 품은 생각은 있습니다. 형은 천성이 근후 간결하여 사람들이 감히 의롭지 않은 일로 간섭하지 못하였고, 글씨에 능하고 스스로의 힘을 헤아려 문예(文藝)가 일찍 성취되었습니다. 성종(成宗) 기유년(一四八九)에 생원(生員) 진사(進士)시험에 합격하였는데 비록 귀한 집안에 사위였지만 권력을 인연하여 벼슬에 나가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으며, 영화스러운 벼슬에 나가는 데 급급하지 않았습니다. 또 의복 등을 가난했을 때와 같이 했고, 교유하는 사람은 모두 청렴하고 개결한 선비였다. 임자년에 비로소 벼슬하여 十년 동안 두 번 참봉을 지냈으니, 북부 참봉(北部參奉)과 후릉참봉(厚陵參奉)이며 봉사(奉事)를 두 번 지냈으니 광흥창 봉사(廣興倉奉事)와 풍저창 봉사(豊儲倉奉事)였습니다. 계해년에 상서원으로 옮겼는데 이것이 대개의 이력인데 그 직책이 고을을 다스리는 수령이나 간관(諫官)이 아니어서 아름다운 교화(敎化)와 바른 말로 간(諫)한 풍도가 적게 보여 아쉽지만 옛 사람 가운데도 낭(郎)으로 늙은 사람이 있지 않았습니까. 시사(時事)를 헤아리면 마침 연산군이 착한 사람을 해치려 하자 기미를 알아차리고 해독을 멀리했으니, 현명하지 않으면 그렇게 할 수 있었겠습니까? 마침내 그해에 졸하니 출생한 병술년(一四六六)으로부터 겨우 三十八년이니, 어찌 그리 수명이 짧았습니까? 내가 형의 평소 사정을 자세히 적어 여러 고자(孤子)들이 사모하는 마음을 위로해 주고자 하지 않음이 아니라 지당(池塘)의 춘초몽(春草夢)이 끊어진 지 이미 오래여서 나 역시 늙어 다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상과 같이 적습니다. 우리 순창 조 씨는 고려 중엽의 검교시중 휘 장을 시조로 하는데 덕을 부지런히 심어 판도판서 휘 홍규와 옥천군, 휘 전이 잇달아 벼슬하였다. 농은공 휘 원길은 진사(進士)로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문하시중에 이르러 정포은·이목은과 덕망이 같았는데 공양왕 때 정책(定策)한 공으로 전공 판서에 올라 옥천부원군에 봉해졌는데 후에 순창으로 은거하였으니, 이분들이 고조 이상이다. 증조 휘 유는 호가 건곡인데 역시 상위로 급제하여 벼슬이 중현대부(中顯大夫) 전농 시부정(典農寺副正)을 지냈는데 고려 말을 당하여 상제가 문란할 때에도 부모의 전후상에 모두 三년을 치루었다. 나라가 망하자 우리 조선조에서 한성판윤으로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고 순천 부유향(富有鄉)으로 숨어살면서 가정을 세웠는데 세종께서 「효자전 부정 조유의 정려」라 특명하였으니, 이는 대개 충절을 세운 것을 아울러 포상한 것이다. 조의 휘는 사문(斯文)으로 음보로 좌군사정(左軍司正)을 지냈고 동생 절도사 숭문(崇文)이 사육신의 난 때 부자가 함께 목숨을 바쳤기 때문에 벼슬길이 끊어지게 되었다. 사정공에게는 아들이 넷인데 셋째 아들 삼례찰방 휘 지륜은 바로 내 선고(先考)의 형이며 바로 공을 낳은 분이다. 어머니는 진주 하 씨(晋州河氏)로 강장공(剛莊公) 한(漢)의 따님인데 공은 외아들이며, 자매도 없다. 종실(宗室: 임금의 일가)인 영응대군 염(琰)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부인은 유순하여 시부모를 매우 정성스레 모셨으며 공과 동갑인데 작년 기축녀(己丑年)에 졸하였다. 五남一녀를 두었으니 장남은 숙규(淑珪)로 오수우승(獒樹郵丞)인데 현령 김윤탁(金允濯)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다음 숙기(淑琦)는 생원 양균(楊均)의 딸에게 장가들어 두 아들을 낳았으나 아직 어리고 딸 하나는 김경정(金景貞)에게 출가하였다. 다음 숙경(淑璟)은 충순위(忠順衛)로 통덕랑 최삼계(崔三戒)의 딸에게 장가들고, 그다음 숙함(淑瑊)은 남양(南陽) 홍기종(洪起宗)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그다음 숙관(淑瓘)은 청송 심 씨(靑松沈氏) 광붕(光鵬)의 딸에게 장가들어 二남 一녀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고 사위 송세림(宋世琳)은 임술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감찰을 거쳐 능성현령(綾城縣令)으로 나아갔다. 서녀(庶女)가 하나 있는데 심환(沈煥)에게 출가하였다. 가정 九년 경인(庚寅) 추八월 二十일 從弟 通訓大夫前奉常寺正知製敎 침(琛)은 삼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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